열흘 즈음 전에 응급실 노티를 받았다. 하루하루 정해진 일도 하기 바쁘고 정신없는데, 그 와중에 오는 응급실의 연락에 기뻐할리가 없다.(불과 몇 달 전, 인턴으로 일 할 땐, 왜 1년차들이 응급실 노티를 그렇게도 싫어하는지 몰랐는데, 이제는 알겠다.) 60대의 여환에 좌측 이하선쪽의 부종과 통증이 있다고 연락이 왔고, 난 이하선염이겠거니 하곤 환자를 보고 처방을 냈다. 일반적인 이비인후과적 신체검진을 하던 중, 아무래도 인두와 후두 좌측이 좀 부어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고, 침 삼키기조차 어려워하고 뜨거운 감자 물고 있는 듯한 목소리(Muffled voice)를 그냥 넘기기가 찜찜하여 경부 컴퓨터 단층촬영을 처방하고 사진을 보니 역시나, 편도주위농양과 이하선염이 같이 있었다.
결국 입원을 하고, 항생제 치료에도 큰 호전이 보이지 않아 초음파 하 흡인도 해 보고, 잘 안 되어서 CT를 다시 찍었더니 심부경부감염으로까지 진행되고 있는 상태. 가장 피하고 싶었던 응급 수술 준비를 하여 전신마취 하 경피적 절개배농을 시행했다. 응급실에서부터 수술 가능성을 염두해 두고 준비했었고, 다행히 전신마취에 결격사항이 될만한 특별한 이상 소견이 없어서 잘 진행할 수 있었지만, 만약 과거력에 당뇨라도 있거나, 혈액검사나 방사선 촬영에서 이상 소견이 있어 타과 협진을 몇 개 진행해야 했다면... 고개가 절로 도리도리. 게다가, 경피적 절개배농을 시행한 이후에는 1년차가 아침 저녁으로 하루 두 번 봉합도 안 되어있고 배액관이 들어있는 수술 부위를 깨끗하게 세척하고 소독해야 한다. 3월에는 이 것만 하는데 30분 걸렸으나, 이제는 익숙해 져서 병동 간호사랑 손발 잘 맞으면 10분에 끝나긴 한다. 그래도, 일이 느는데 좋아할 리가 있을까.
다행히, 이 분은 절개배농 이후 지속적인 경정맥 항생제 치료와 나의 정성이 듬뿍(!?) 담긴 아침 저녁의 세척/소독 효과 때문인지 좌측 볼과 턱 아래의 붓기와 압통이 눈에 띄게 사라졌고, 그 이후 수술실에서 세척 및 소독, 배액관을 조금씩 빼 내는 국소마취 수술을 두 번 더 받고 오늘 아주 작은 배액관만 가지고 퇴원했다. 다음 주 화요일에 외래에 오시면 그 때 남아있는 배액관을 다 빼고, 실밥도 일부 뽑고 그러겠지.
입원해 계시는 동안 협조도 잘 되었고, 항상 유쾌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던지라, 환자 질병의 특성 상 본의 아니게 나를 조금 힘들게 했던 것 외에는 큰 문제가 없던 분이었는데, 오늘 아침 나랑 소독할 땐 괜찮던 분이 아침에 윗년차 선생님들과 회진 도는데 병실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고 계신거다. 영문을 몰라 그냥 잘 쉬시라고만 하고 회진을 마쳤는데, 찜찜한 마음이 가시질 않았다.
토요일이라 약간은 여유있는 외래 상황, 각종 잡일과 다음 주 수술 환자들 수술 가능성을 챙기고 있는데, 누군가 한뿌리 한 박스를 내미시는거다. 그러고보니 이 분의 따님. 그 동안 잘 해 주셔서 고맙다고, 혹시 이 음료 안 드실거면 다른 거랑 교해 드시라고 영수증까지 챙겨 주셨다. 이런거 안 주셔도 되는데... 하다가 감사합니다! 하고 넙죽 받았다. 아침에 왜 울음을 터트리신건지 여쭈어봤더니 가끔 그러신다고. 혹시 모르니, 마음이 힘드시면 정신과 진료도 꼭 보시라고 말씀 드리고 다음 외래 오실 때 뵙자고 인사 드렸다.
from ash-s on Flickr
우리 과 인턴도 없는 요즈음 매일매일 터지는 구멍(내과 1년차 모 군의 말로는 우리 과가 구멍 보는 과라서 구멍이 난다는데...)에 혼나느라 우울한 차에 작은 선물을 받게 되니 좀 위로가 되는 것이 사람 마음 참 간사하다. 그러고보니, 입원해 계실 때도 한 번 쥬스 한 상자 주신 적이 있었구나. 그 땐 바로 병동 간호사들이랑 나누어 먹었었다. 오늘 받은 한뿌리 한 박스는 외래 마치기 전 다시 편의점으로 달려가 아이스크림이랑 음료수랑 잔뜩 바꾸어와서 교수님과 윗년차 선생님들, 외래 간호사들이랑 나누어 먹었다.
요즘에야 의사를 해도 욕 안 먹으면 본전이라지만, 가끔 이렇게 협조가 잘 되는 분들 만나면, 그리고 좋아져서 퇴원하시는 걸 보면 좀 뿌듯하다. 구멍 내느라 놓치는 것도 많은데 말이다. 게다가 이렇게 작은 선물까지 안겨주고 가시면, 더 잘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간호사들에게는 '내가 너무 불친절해서, 좀더 친절하라고 주시나봐요.'라고 농담하기도 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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