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신관 응급실 당직이었다. 저녁 6시부터 아침 7시까지 근무, 물론 그 전에도 당직 근무, 그 후에도 낮 근무가 계속 된다. 시작은 괜찮았는데, 저녁 8시 이후로 아픈 아기들이 마구마구 몰려들었다. 새벽 서너시 정도 되어서야 겨우 정리가 되었고, 피곤을 이기지 못 한 나는 응급실 구석 침대에 누워 잠시 눈을 붙였다.
혈색소, 영어로는 Hemoglobin은 우리 피 속의 적혈구 안에 들어있는 녀석으로 산소와 결합하여 온몸에 산소를 전달해 준다. 흔히 '빈혈 수치'로 알고 있고, 산소 전달의 기능을 하는 만큼 이 녀석들이 부족하면 당연히 좋지 않다.
'선생님, 얼른 일어나보세요. 헤모글로빈 낮은 환자가 왔어요.'라는 간호사의 소리에 일어나보니, 잠결에 봐도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있고 온 몸이 창백한 젊은 여자가 침대에 누워있었다. 환자가 오면 활력징후 측정이 가장 먼저이겠으나, 그것과도 함께 바로 수액을 두 개 연결하고 있었다. 혹시, DOA인가 했는데 다행히 의사소통도 되는 상태였다. 주소는 호흡곤란과 하혈.
원래는 과거력 파악하고, 차트 쓰고, 기본적인 검사 결과 나온 후 당직 산부인과 선생님께 연락 드려야 하나, 사안이 사안이니만큼 얼른 과거력을 물어보고, 간단히 차트 작성 후 바로 당직 산부인과 선생님께 연락 드렸다. 간단한 과거력 및 현재의 활력징후를 알려드리니 알겠다고 얼른 내려오셨다.
그 사이 피검사가 진행되어 나온 혈색소 수치는 1!!! 보통 12나 13 이상이 되어야 하는 수치가 10이 아니라 1이었다. 혈액 중 적혈구의 비율을 따지는 헤마토크릿은 40% 내외는 되어야 하나, 이 환자의 수치는 4.9%. -_-;; 2년 전 생리 문제 및 하혈로 찍은 MRI에서 무려 13cm 이상의 커다란 자궁근종도 있고, 헤모글로빈값이 너무 낮아 수혈 및 빈혈 치료를 권유 받았으나 모두 거절하고 그 뒤로 추적관찰이 소실된 상태였다. 당직 선생님께서 상태가 매우 위중하고, 급사의 가능성도 있다고 하는데, 환자와 환자의 보호자인 언니는 가볍게 웃으며 이야기 하고 있었다.
이번 환자의 경우, MRI에서도 확인 되기도 했지만, 배를 만져보기만 해도 바로 알 수 있을만큼 커다란 덩이가 있는데다, 하혈도 종종 많이 되고, 숨도 가쁘며 일상 생활도 쉽지 않았던 모양인데, 자기 병에 대한 인식, 즉 병식이 없고 현대 의학에 대한 막연한 불신으로 치료를 거부해하여, 2년 전에 비해 매우 안 좋아진 몸 상태를 가지고 병원에 오게 되었다. 환자에게 병식이 없었다면, 환자 가족들이나 주변 사람들은 뭘 했던걸까? 이렇게 상태가 안 좋은데 병원에 가 보라는 말을 안 해 보았을까? 뭐, 평양감사도 자기가 싫다면 안 한다지만, 그래도 이렇게 되기까지 치료를 아예 받지 않았다는데서, 환자에 대한 기본적인 기대와 신뢰가 무너져 버렸다.
응급조치가 끝난 후 입원 처리 되어 더 많은 처치와 치료를 받고 있을터인데, 가끔 이렇게 병식도 없고 협조가 안 되는 환자들을 만나면 정말 힘이 빠진다. 이럴거면 아프질 말든지, 아프면 의사 말 잘 듣던지 그러지...
그나저나, 혈색소 수치 1과 헤마토크릿 4.9는 아마 앞으로 내가 의사하면서 두 번 다시 보지 못 할 최저값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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