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族譜)를 차고 - 성영제
내 손에 족보(族譜)를 잡은지 오래로다
아직 아무도 본 일 없는 새로 뽑은 족보
벗은 그 무서운 족보 그만 흩어버리라 한다
나는 그 족보가 벗도 해할지 모른다고 위협하고
족보 안 잡고 살아도 머지 않아 너 나 마주 가버리면
억만 세대(億萬世代)가 그 뒤로 잠자코 흘러가고
나중에 땅덩이 모지라져 모래알이 될 것임을
'허무(虛無)한듸!' 복보는 봐서 무엇하느냐고?
아! 내 의대에 왔음을 원망않고 보낸
어늬 하루가 있었던가, '허무한듸!' 허나
앞뒤로 덤비는 짐승 바야흐로 내 족보를 노리매
내 산 채 짐승의 밥이 되어 짖기우고 할퀴우라 내맡긴 신세임을
나는 족보를 차고 선선히 가리라
막음 날 내 외로운 성적표를 건지기 위하여
교수님께서 내 주신 숙제 때문에 정말 오랜만에 예전 족보를 꺼내보았다. 본과 1학년 2학기 말에 배운 소화기학, 소화기내과와 관련 외과, 소아과, 병리과, 영상의학 등등이 모두 총망라되어있던 과목으로, 임상과목의 쓰디 쓴 맛을 내게 첨 안겨준 그런 과목이었다. 아무튼, 간담췌를 펴서 넘기는 동안 못 보았던 시 한 구가 눈에 들어왔다. 다시 읽어보니 유명한 시를 패러디한 듯 한데, 찾아보니까 김영랑 시인의 '독(毒)을 차고'라는 시를 패러디한 것이었다. :) 의대생활의 어려움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시로써, 화자는 벗과 대화를 나누며 벗의 충고를 듣지만 그래도 족보를 차고서라도 겨우겨우 시험을 통과해 나아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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