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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자유 M.D.

불친절한 의사로 거듭나기

의사 중 가장 초기형(!?)인 인턴 생활 시작한지 벌써 반년이 지났다. 서당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지만, 아직 3년은 되지 않았고, 그래도 병원밥 먹다보니 어느 정도 자라나는 느낌이다. 느낌만 그렇고, 실상 실력과 지식이 늘지 않는 것은 큰 문제고 말이다.

from dmason's Flickr.com

언제 글을 좀 정리해서 올려보고 싶은 마음도 있으나, 아무튼 수련 병원에서 전공의의 삶은 시간과의 싸움이 지속된다고 볼 수 있겠다. 시간과 공간, 능력은 한정되어있는데, 그에 아랑곳 하지 않고 몰려드는 환자들을 진료하려면 방법은 한 가지 뿐이다. 환자 한 명 한 명을 최대한 능률적으로 봐야 한다는 것. 그러다보니, 상당히 불친절한 의사가 되어가고 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환자를 처음 만나면 보통, '어디 아파서 오셨어요?' 라고 물어본다. 여기에 '귀가 이상해서 말이에요. 예전에도 이상했었는데, 어쩌도 저쩌고...' 라고 대답해 주면, 다 듣기도 전에 '가장 불편한 것이 뭐에요? 병원 와야겠다고 마음 먹게 된 가장 큰 이유요.' 라고 대답을 잘라버린다. 즉, 내가 원하는 단답형의 대답을 듣기 위해 상당히 공격적인 대화를 이끌어 나가게 된다.

이런 경우도 있다. '기침이나 콧물, 가래 있어요?' 라고 물으면, '기침이 좀 있기도 하고, 예전에도 좀 있었는데...' 이러면 또 말을 자르게 된다. '기침이 있어요? 없어요? 콧물이 나와요? 안 나와요?' 이러고 말이다. 내가 원하는 답은 '예' 혹은 '아니오'의 단답형인데, 보통 환자들은 서술형으로 풀어준다. '술 얼마나 드세요?' 라고 물어보면 대부분이 '조금 먹는다.'고 한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답변은 한 번에 얼마나 먹는지, 1주일 혹은 한 달에 얼마나 자주 먹는지 평균적인 소비량이 궁금한 것이다. 이런 답변을 처음부터 하는 사람은 당연히 없다. 그러니 다시 공격적으로 물어보게 된다.

어찌보면 의사가 보는, 아니 보고자 하는 환자의 상태와 환자가 느끼는 자신의 상태가 다르다... 고 하기엔 좀 이상하고, 보는 관점과 방법이 달라서 그런지 서술하는 방법도 다르다. 의사의 언어와 환자의 언어가 다르다고 할까.

그래도, 오늘 이비인후과 외래가 다 끝난 후 외래 간호조무사로부터 칭찬 들었다. '선생님, 예진 참 잘 해요.' 듣기 좋으라고 하는 소리일 가능성이 다분하겠지만, 그렇지 않아도 잘 못 들으시는 분들이 많이 오셔서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다 못 해 필담까지 나누느라 힘들었던 하루의 피로가 조금은 가시는 기분이 들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하지 않은가.

from Sreejith K's Flickr.com


아무튼, 나는 오늘도 더욱 더 불친절한 의
사로 거듭나고 있다. 그나마, 의사의 언어와 환자의 언어 사이의 간격과 이해의 격차를 조금이라도 줄여볼까 하는 택도 없는 희망을 가지면서 말이다.

p.s. 아무리 친절하려고 해도, 꽉 차있는 외래 대기실도 모자라 밖에서도 기다리고, 예진해야 할 차트는 쌓여있는데, 다른 해야 할 일도 넘치는 상황에선, 나의 인격이 모자란 탓인지, 친절하기가 참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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