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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자유 M.D.

역할 모델, Role model


인턴이라는 위치가 그렇듯, 많은 선생님들을 만나게 된다. 특히, 지난 번에 돌았던 응급실 상황 상 다른 과의 개입이 필요할 경우 인턴이 각 과 당직 선생님께 보고(흔히 '노티'라고 줄여 부른다. 아마도 notify란 뜻이겠지.)를 해야 하다보니 더욱 그렇다. 나도 이제 겨우 몇 개월 째이긴 하지만, 콜 받아보고 노티도 받아보고 하면 참 힘들고 짜증난다. 그도 그럴 것이 그렇지 않아도 일 많아서 힘들고 있는데, 거기에 일 또 하나 추가해 준다는 전화가 오면 누군들 좋아하겠는가.

힘들기로 꼽자면 정말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신경외과, 그 중에서도 가장 힘든 것이 분명한 1년차 김JJ 선생님이라고 계신다. 우리 병원 몇몇 과들이 세브란스와 레지던트 파견 근무를 주고 받고 있고, 신경외과도 그러는 과 중 하나라 우리 병원 1년차 선생님이 세브란스에 가 있고, 세브란스 1년차 선생님이 우리 병원에 와 있는 상태다. 이 김JJ 선생님께 노티를 하면 절대 인턴을 혼내지 않는다. 보통은 노티하면 반 이상이 혼낸다. 게다가, 노티 받고 응급실에 내려와 차트 보면서 '선생님, 고마워요. 차트를 이렇게 잘 써주다니... :)' 이런다. 궁금한 것이 있어서 물어보면 웃는 얼굴로 알려주고, 지나가다 만나면 웃는 얼굴로 인사 해 준다. 인턴들한테만이 아니라 모두에게다 그런다. 분명히 우리 병원에서 가장 힘든 사람일텐데, 힘들어서 인상도 쓰지 않고, 온화한 얼굴로 사람들을 대한다니 정말 대단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게다가, 틈틈히 공부하라고 따끔한 충고까지 해 주고 말이다. 나만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다른 인턴들, 병동 및 응급실 간호사들도 모두 입 모아 같은 이야기를 한다.

이 이야기를 (이 쪽에 대해 잘 아시는) 한 지인께 말씀 드렸더니만, '미친거 아니에요? 정상범위를 너무 많이 벗어났네요. :D' 이러실 정도로 정말 대단하다. 자기가 힘들다고 다른 사람에게 짜증내거나 화내지 않는 것, 성인군자의 기본자세일테지만, 나와 같은 범인들은 감히 생각도 못 하는 엄청난 상태이다.

끝날 것 같지 않은 인턴 생활이 언젠가는 끝나고, 나도 언젠가 1년차가 되고, 2년차가 되고, 또 3년차, 4년차가 되겠지. 그 때도 김JJ 선생님으로부터 받은 신선한 충격을 잊지 않고 있어야겠다.

또 한 명의 역할 모델을 만나게 되었다.


p.s. 이미 나보다 더 먼저 의업의 길을 가고 있는 친구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연초에는 차분히 타이르고 알려주고 하지만, 점점 일 힘들어지는데 노티는 엉망이고 하다보면 화를 내게 되고, 또 화를 내면 노티가 잘 정리되어 오고 그런다고 한다. 물론, 나도 노티하다 혼나는 입장에서, 성격 안 좋은 레지던트에게 노티하기 전에는 혹시라도 뭐 빼놓은거 있나 살피게 되는데, 그렇지 않고 성격 좋고 정말 좋은 레지던트에게 노티할 땐 또 다른 이유로 차근차근 챙겨 노티하게 된다. 설사 무얼 하나 빠뜨렸더라도 정말 마음에서 우러나는 죄송한 마음에 어찌할 바를 모르겠고 말이다.

분명, 성격 나쁜 것이 단기적으로 볼 땐 사는데 편해 보인다. 적어도 내가 경험해 본 사회에서는 말이다. 그래도, 어느 정도의 경지에 오른 좋은 성격을 가지고 있다면, 내가 내세우기 전에 남들이 알아주고 그러기에 더 잘 해줄 것이다. 그렇게 믿어야지.

그렇게 되려면 마음을 많이 닦아야 할텐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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