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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잡담

누구를 위한 정부인가

어제 밤, TV 채널을 돌리다가 SBS 그것이 알고싶다라는 프로그램을 잠시 보게 되었다. 대강 보니 해외에서 사고를 당한 국민들을 해외공관이, 즉 대한민국 정부가 적절한 대처를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성토를 하고 있었다. 영국에서 의문사를 당한 한 청년의 아버지는 5년 동안 홀로 아들의 사인을 밝히기 위해 백방으로 뛰고 있으나, 영국 주재 대한민국 대사관에서는 도와주는 것이 하나 없었다. 러시아에서 유학 중인 학생들이 스킨헤드의 무차별적인 공격을 받아도, 러시아 주재 대한민국 대사관에서는 사고 처리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음은 물론이고 평소에도 이런 사고를 막기 위한 대처를 전혀 하고 있지 않았다.

처음 혼자 힘으로 해외여행을 했던 2001년 여름. 학교 후배들과 큰 꿈을 품고 그리스로 날라갔다. 파르테논 신전도 보고, 아름다운 에게해를 건너 그림같은 산토리니 섬에도 가 보았다. 그 산토리니 섬에서 일행과 함께 차를 빌렸고, 렌트카를 반납하러 가보니 업체에서는 없었던 상처가 차에 생겼다면서 트집을 잡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렌트 계약서를 작성하던 당시 우리가 꼼꼼히 보지 못해 계약서 상에는 없던 상처였는데, 내 기억에는 분명 빌릴 당시에도 있었던 작은 상처였다. 그 업체 주인은 직원들을 불러 차에 난 상처를 보여주면서 동조를 얻어내고 우리는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렌트할 때 추가로 돈을 내어서 보험을 들긴 했었지만 100달러 이상만 커버가 되고 100달러까지는 우리가 내야 하는 것이어서 학생으로선 큰 돈을 내게 되어버린 것이었다. 설사 우리가 차를 사용하는 동안 그 상처가 났더라도 적절한 수리점에서 견적을 받아와야 하는 것일텐데, 그런 것도 없이 돈을 내라고 하니 정말 난감한 상황이었다.

그 때 불현듯 생각난 것이 바로 그리스 주재 대한민국 대사관이었다. 여행 책자에서 부랴부랴 대사관 전화번호를 찾아서, 전화카드도 구입해서 어렵사리 통화를 시도했다. 어떤 직원인지는 모르겠지만 전화 통화가 되길래, 우리의 사정을 이야기하고 아무래도 사기인 것 같다고 도와달라고 호소했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싸늘했다. 계약서 작성 당시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우리 잘못이므로 대사관에서는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

그렇다. 우리 잘못이었다. 차량 인도 전의 상처에 대해서는 계약서에 충분히 표시를 해 두어야 했던 것이다. 어려서.. 차를 빌려본 적이 없어서 몰랐다는 변명은 통하지 않는다는 것쯤은 안다. 그런데 속상한 것은, 대사관의 태도였다. 아무리 우리가 한 실수로 인해 일이 벌어졌더라도, 옛말에 '아 다르고 어 다르다'고, 좀더 따뜻하게 이야기를 해주기를 바랬던 것이다. - 아이고.. 큰일이네요. 학생들이 먼 곳까지 여행와서 차 빌렸다가 이런 일을 당하다니.. 그런데, 계약서 작성할 때 잘 봤어야 하는데, 서류로 남겨진 자료로 입증할 수 없으니 대사관에서도 도와드릴 방법이 없네요. 인생 공부 했다 생각하고 다음부터 조심하세요. - 뭐, 이렇게라도 말 해 주었다면 그나마 덜 속상했을 것이다.

아무튼... 여권과 신용카드를 업체에 맡겨놓은 상태였기 때문에 앞으로의 여행을 위해 더이상 항의하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추가로 돈을 내고서야 사건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그리고는 느꼈다. 저들은 대한민국 국민인가, 아닌가?

어제 TV 프로그램에 나왔던 사람들도 그랬다. 그들도 대사관에서 뭐 대단한 일을 해 주기를 바라지 않는다. 예산도 부족하고, 인력도 부족한 것 다 알고 있다. 돈이 없어도, 사람이 없어도, 동포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해 주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가? 이역 만리에서 어떻게 죽었는지도 모르고, 부모 동의 없이 부검해 버리고, 부검한 결과도 석연치 않은 사건에 대해 대사관은 해줄 것이 없다며, 유가족에게 모든 것을 미루어버려서야 되겠는가? 대한민국 학생들이 스킨헤드의 칼과 총에 쓰러져가도 대사관은 사태 수습이나 재발방지를 위한 노력 하나 없이 부족한 예산 빼돌려 현지 술집에서 흥청망청 써버려서야 되겠는가?

국가는 자국민 보호의 의무를 가진다. 나라에서 백성을 지켜주지 못한다면 어느 누가 지켜준단 말인가? 외교통상부에서는 해마다, 외교통상부를 믿고 안전하고 즐거운 해외여행을 하라는 유인물을 만든다. 그런데, 정말 대한민국 국민은 대한민국 정부와 외교통상부를 믿고 마음 놓고 안전하고 즐거운 해외여행을 할 수 있을까?

요즘 이상하게도 원론적인 이야기를 많이 하게 되는데, 내가 이상주의자이기 때문이 아니다. 아무리 세상이 더럽고 힘들어도, 어느 정도 상식은 통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기본 중에 기본이 지켜지지 않으면 이 나라는 어떻게 되어야 한단 말인가.


大韓民國憲法


第1條
①大韓民國은 民主共和國이다.
②大韓民國의 主權은 國民에게 있고, 모든 權力은 國民으로부터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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