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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자유 M.D.

내가 행하는 Tailor-made medic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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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에는 이런 말 잘 안 쓰는 듯 한데, 내가 의과대학에 처음 입학했던 10여년 전에는 Tailor-made medicine, 즉 맞춤의학이라는 말이 유행이었다. 마치 재단사가 내 몸에 맞추어 멋진 양복을 만들어주는 것처럼, 의사도 환자를 치료할 때 그 환자 개개인의 특성에 따라 딱 맞는 치료를 행해야 한다는 그런 개념이었다. 지놈인지 게놈인지, 아무튼 인간의 유전자를 해독하고 점차 알아가면서 한편으로 많은 정보를 알게 되고(요즘 말로 빅데이터?), 그것을 활용한 개인화된 치료 접근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겠다.


나같은 햇병아리 돌팔이가 심도 있는 연구를 해 볼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나름대로 맞춤의학이라고 자화자찬하고 있는 한 가지 방법이 있다. 바로, 어린이 환자들을 수술방에 데리고 갈 때 하는 나만의 비법!


저년차일 때, 그리고 경험이 별로 없을 때는 바쁜 수술 일정을 마무리 하기 위해 무리하게 환자를 데리고 들어가는데만 촛점을 맞추고 일 하다보니 아이들이나 부모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 하여 아이가 울어버리기 일쑤였지만, 점점 시간이 지날 수록 그게 다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어린이 환자들은 그렇지 않아도 수술을 한다는 불안감에다 낯선 환경에 노출되어 더더욱 더 힘들어 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우리 유진이만 봐도 만화를 볼 때는 세상이 무너져도 모르고 빠져있는 것을 보고 이것을 활용하게 되었다.


1. 환아와 부모님에게 인사를 하며 환자 확인을 한다. 이름은 무엇인지, 무슨 수술 받으러 왔는지, 어느 쪽인지, 어떻게 불편한지 등등... 어린이 친구들에게는 어느 어린이집 혹은 유치원을 다니는지, 무슨 반인지, 담임 선생님 성함은 무엇인지 등을 물어본다.


2. 부모님에게 마취과 선생님이 나와서 마취 설명을 해 줄거라고 조금 더 기다리시라고 안내해 드린다. 그 이후 아이에게 앞으로 할 일을 알려준다. 1번, 아저씨랑 엄마 아빠에게 인사하고 들어가기. 2번, 아저씨와 만화 보기. 3번, 만화 보다가 자기. 4번, 자다 깨서 나오기. 5번, 엄마 아빠 만나기. 그리고 내가 덧붙이는 말, '아저씨가 이야기 한 것 중에 무섭고, 아프거나, 어려운 것 있어?' 대부분의 씩씩한 어린이 친구들은 고개를 젓는다. :)


3. 그리고, 환아에게 어떤 만화를 좋아하는지 물어본다. 만 3세 이전이라면 남녀 구분 없이 뽀로로가 통한다. 그 이후로는 성별에 따라 다르다. 여자아이들은 레고 프렌즈, 짱구는 못 말려, 안녕 자두야, 그 외에도 순정만화들을 좋아하고, 남자아이들은 레고 닌자고, 파워레인저(가장 최근 시즌은 캡틴포스) 등을 좋아한다. 참, 성별 관계 없이 라바도 인기가 좋다. 이렇게 환아가 좋아하는 만화를 확인한다.


4. 마취 동의서를 받는 동안, 수술실 안으로 들어가 수술실 내 컴퓨터에서 해당 만화를 찾아 켜둔다. 온라인 비디오 사이트를 검색해 보면 다 나온다. ;)


5. 다시 나와 마취 동의서가 완료된 것을 확인하고, 환아와 다시 이야기를 나누며 잘 할 수 있다고 손가락 걸고 약속하기도 하고, 하이파이브를 한다. 그리고, 환아가 준비되면 부모님과 인사하고 수술실로 들어간다.


6. 환아와 수술실로 들어가는 동안, 형제관계, 교우관계, 좋아하는 친구나 색깔, 만화 등에 대한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누고, 수술실에 들어가면 이미 재생 중인 좋아하는 만화를 보며 수술대로 옮겨 앉아 마취과 손에 넘겨져 서서히 마취에 들어간다.


이러한 방법이 항상 성공적인 것은 아니다. 부모와 분리불안이 없으면서, 씩씩하고 당당한 아이들은 세 돌 즈음이라도 용감하게 잘 하지만, 나이가 많더라도 안 되는 아이들은 어쩔 수 없다. 그래도, 나는 의사로서 아이에게 관심을 보이고, 부모는 그런 나를 보면서 조금 안심할 수 있고, 아이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만화 보러 간다니(네가 다섯 번이나 보여준다고 몰래 이야기 한다.), 아무 생각 없이 좋아한다. :)


바쁘고 힘들고, 내 몸 하나 챙기기 어려울 때는 이런 생각을 못 했는데, 연차가 올라가고 마음에 여유가 생기면서 이런데 눈을 뜨게 되었다. 기계적으로 환자를 보고, 치료하고, 수술해 주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그 과정에서 환자와 얼마나 많은 교감을 나누고, 좋은 관계를 쌓을 수 있는가는 의사가 가진 의학적 지식과는 별개로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한 그 사람의 능력에 따라 다르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특히, 관계를 맺어가는데에 서툰 우리나라 사람들이 대부분이지만, 그래도 그 관계의 중요성이 점점 중요해져가기 때문에, 의사라고 해서 환자 치료에만 관심을 갖기 보다, 그 환자들과 어떤 관계를 쌓아나갈지에 대해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특히, 나와 같은 햇병아리 의사들에게 말이다.


http://www.voxxi.com/healthcare-from-physician-patient-relationship-vheal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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